[천자 칼럼] 정화의 300척과 콜럼버스의 3척

입력 2017-07-10 18:24   수정 2017-07-11 07:26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612년 전인 1405년 7월11일, 명나라 환관 정화(鄭和)가 첫 남해 원정(遠征)을 떠났다. 길이 137m, 넓이 56m의 대형 보선(寶船) 62척을 비롯해 함대는 모두 300척에 이르렀다. 가장 큰 배는 3000t이 넘었다. 승선 인원도 2만8000명이나 됐다. 정화는 1433년까지 7차례에 걸쳐 동남아와 인도,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아프리카 동쪽 케냐 땅까지 밟았다.

그로부터 87년이 지난 1492년 8월3일, 이탈리아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스페인을 출발했다. 선박은 250t급 3척이 전부였다. 제일 큰 산타마리아호도 길이 27m, 넓이 9m에 불과했다. 인원은 고작 88명. 그는 이렇게 초라한 함대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그는 아메리카를 인도라고 믿었지만 1502년까지 4차례 항해를 통해 대서양을 횡단하는 최단 항로를 개척했다. 나아가 유럽인들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바꿨다.

겉으로만 보면 정화로 상징되는 동양의 해양사가 훨씬 앞선다. 그러나 세계사를 주도한 것은 뒤늦게 출발한 서양의 ‘대항해’였다. 왜 그랬을까. 학자들은 동서양의 상반된 가치관을 가장 큰 이유로 꼽는다. 정화는 중국 황제의 위엄을 만방에 떨치고 후진국에 문물을 전해준다는 명분을 앞세웠고, 콜럼버스는 유럽과 중동의 무역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새 항로를 찾는 실리를 중시했다. 정화는 중국 황제의 명을 받아 원정에 나선 관료였고, 콜럼버스는 스페인 정부와 계약을 맺고 탐험에 나선 민간 기업가였다.

이후의 행보도 정반대다. 중국은 예산 문제와 유교 이념을 이유로 바닷길을 막는 해금(海禁) 정책을 폈다. 몽골족 등의 위협에 대비해 내륙 방어에 급급했다. 해상 교역 금지는 ‘지각 개항’으로 이어졌다. 결국 근대화에 뒤처져 열강의 먹잇감이 됐다.

이와 달리 서양은 금과 향료를 찾아 새 바닷길을 탐험하며 ‘위대한 항해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다. 물론 정화를 평화적 외교, 콜럼버스를 폭력적 정복의 시각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정화가 실론(스리랑카)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왕을 중국으로 압송한 사례 등을 보면 이분법으로만 볼 것도 아니다.

5~6세기가 지난 지금은 바다가 아니라 우주에서 또 다른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우주선 명명부터 재미있다. 1969년 최초로 달에 착륙한 미국 우주선 아폴로11호의 사령선이 컬럼비아였다. 1981년 첫 왕복우주선 이름도 컬럼비아다. 중국이 2003년 쏘아올린 유인우주선 이름은 선저우(神舟) 5호다. 모두가 탐험가와 배를 이름에 썼다. 무한공간을 항해하는 배가 곧 ‘우주선(宇宙船, spaceship)’이다. 새로운 ‘대항해’의 미래는 또 어떤 모습일까.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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